그들이 있던 자리

오랜만에 강아지들과 아침언덕을 만나러 갔다.
여름 내내 펄펄 끓던 햇살과 흐늘거리던 바람에 파랗게 질려 있던 잡초들은 이제 그들과 작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꽃과 씨앗들을 먼저 챙겨 보낸 홀가분한 몸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가을이 금빛 웃음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무거운 겸허는 비워도 좋을 시간이었다.
지평선에 걸터앉은 구름과 눈 맞추고, 하늘을 우러러도 한점 부끄럼 없는 한 해를 자랑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바람은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태양은 알맞게 식어 있었다.
기분 좋은 반가움으로 가득한 언덕의 아침이었다.
언덕의 바람보다 더 기분이 좋아진 꼴이형제, 똘이와 콩이는 저희들의 신바람을 사방에 휘날렸다.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썰렁했다. 계절 탓이 아닌, 낯선 쓸쓸함이었다.
꼴이들도 그걸 느낀 듯 패인 골짜기를 기웃거리고 넝쿨에 감긴 관목아래를 살폈다.

나는 곧 아이들이 찾는 것을 알아챘다.
기슭 곳곳에서 유유자적 노닐던 사슴가족들이었다.
그 많던 사슴들이 오늘 아침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꼭대기에서 아침의 모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짐작으로 조금 서둘러 올라갔다.
나보다 더 마음이 급해진 꼴이들이 바람처럼 내달았다.

사슴가족들이 즐겨 모임을 가지던 그 장소에 당도한 내 가슴이 경첩 빠진 문짝처럼 덜컥 내려앉았다.
사슴의 무리들이 마을을 내려다보며 온몸으로 새날을 맞이하던 그 곳에, 잘 다듬어진 목조 뼈대가 사람의 집 골격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비수가 스윽 심장을 스쳐갔다.
내 눈에 비친 그것은 목조 뼈대가 아니라 쫓겨난 사슴들의 아픈 해골이었다.
가을풀색의 털과 이슬 빛 눈망울과 순한 두 귀를 모두 잃어버린 앙상한 사슴뼈였다.

오늘 아침 언덕
예전의 아침 언덕

잃어버린 언덕의 오랜 벗들

꼴이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사슴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이 늘 기다리고 있던 곳,
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던 곳,
와다다! 달려간 꼴이형제와 껑충거리며 술래잡기를 하던 곳,
꼴이들이 막무가내 추격전을 멈추던 사슴들의 요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모든 장소들을 살피고 다녔다. 그러나 간 데가 없었다.
그 많던 토끼들도 다람쥐들도 오늘 따라 보이지 않았다.
언덕은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이 없는 언덕은 모든 움직임이 멎은 듯했다.
정말 희한하게 나무도 새들도 움직임 없는 정물이 되었고, 떠 오르는 태양조차 활기가 없었다.
쫓고 쫓기던 작은 이들이 사라진 언덕은 똘이와 콩이의 신바람도 빼 놓아 아이들은 잔뜩 풀이 죽었다.
내 마음도 휑하니 비어버렸다.

우리는 헛헛하게 언덕을 돌아 내려왔다. 가파른 앞 길로 올라가 평평한 비행장 길을 돌아서, 느슨한 옆길로 내려오는 게 우리의 일정한 노선이었다.

새로 짓는 집은, 우리가 내려오는 그 느슨한 언덕길에 등을 돌리고, 건너편에 앉은 세 채의 젊은 집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 집들과는 상종도 않겠다는 듯 제 앞의 비탈을 허물어 그 집만을 위한 넓은 새 길까지 내고 있었다. 늘 지나다니면서도 의식하지 못했던 나무들이 쓰러져 창백한 호흡을 놓고 있었다.

반신불수가 된 언덕이 온몸으로 울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와 풀뿌리들의 꺼져가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해 나도 속 울음을 울었다.

근원초적 본능

“국유림이나 주립공원 같은 데로 찾아가 새 보금자리를 만들거에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앞집 선생님은 서운해 하는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도리질을 했다.
모르는 소리였다. 보금자리를 옮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였다.

얼마전, 주립공원 부근에 새 동네가 생겼는데, 표범들이 자주 출몰해 사냥꾼을 고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뉴스를 들은 미국엄마 루시는 하하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누가 원래 주인인데? 자기들이 주거지를 뺏아놓고는, 가끔 찾아오는 것도 죽이겠다고? 인간이란 참…”

나는 그 표범들을 위해서도 마음 한자락을 내 주었더랬다.
그들도 보금자리 옮기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안전한 주립공원이 바로 옆에 있다 한들 오래 품어온 보금자리가 지닌 그 온기와 향수를 옮겨갈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안다. 체험으로 안다.
9년 전 한국의 내 고향집을 찾았을 때, 집은 남에게 팔려 문이 잠겨 있었다. 마당이나마 보고싶어 까치발을 하고 목을 늘려도 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 놓은 건지, 담장안은 뭔가로 빼곡히 채워져 한 뼘도 볼 수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집을 내가 사서 보존하고 싶었다. 생전의 오빠는 텃밭이 달린 그 집을 절대로 남의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장담했었다. 훗날 우리 다 같이 그 집에서 텃밭 가꾸며 살자고 어린 삼남매가 했던 약속이 스민 집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추억을 먹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집은 낯선이에게 팔려, 사람 살 곳 못되는 잡동사니 헛간처럼 변해 있었다.

나는 그 고향집을 겨우 떠나왔다. 집을 팔아버린 데 대한 원망이 넘치다 못해 미움이 끓어오를 것 같아 마음을 다독이며 눈물을 머금고 떠나왔다.

표범들도 사슴들도 그럴 것이었다.
귀소본능이란, 인간과 동물에게 주어진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이라고 믿는다.
재물의 욕심이 없는 동물들의 본능은 인간의 것과는 견줄 수 없이 강렬하게 응축된 것일 게다.
욕심에 찌든 인간존재인 나도, 태어나고 자란 보금자리를 버리고 오는 게 그리 힘들고 아팠는데, 빈 마음에 단단히 여문 야생동물의 본능이야 말 해 무엇하랴.

창문밖을 내다보던 꼴이형제가 자꾸만 나를 힐끗거리며, ‘끄응, 우웅…’ 신호를 보낸다. 나갈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오늘 아침엔 상처 없는 반쪽의 언덕 기슭에, 뼈가 아닌 온전한 사슴들이 돌아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가 보자.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우리가 그들을 기다려주자.

2개의 댓글

  1. 마음이 허해요. 사람들은 살곳이 없다고 보채고 동물들은 보채볼 엄두도 못내고 자꾸만 쫓겨다녀요.
    사람들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떠나려는 사람들마다 잡아 학대하던 그시절을 우린 역사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우리가 동물들을 밀어내는 지금은 후에 어떤 명분으로 불리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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