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종이와 연필
새로 주문한 키보드가 배달돼 왔다.
포장에서부터 돈의 값이 보였다. 아무리 검약을 강조해도 번번이 흔들리고 넘어지게 하는 고급한 것의 위력에 피식 웃고, 알몸을 드러낸 키보드의 날렵한 모습에 헤벌쭉 크게 웃었다.
노트북 컴퓨터 본체의 키보드는 가깝고도 먼 불편함이 있고, 따로 구입해서 쓰던 키보드는 자리를 많이 차지해 마우스 사용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도 선뜻 바꾸지 못하던 중에 자주 쓰이는 키 하나가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사가 구겨지던 날, 기분 전환으로 생각해 낸 것이 키보드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빨리 배송돼 왔다. 값이 좀 있는 물품의 배달 속도는 대체로 빠른 것 같은데, 그 또한 돈의 값이 아닌가 싶었다.
키보드는 마음에 들었다. 숫자판이 없어 마우스 방해를 하지 않았고 타건도 부드럽고 안정된 느낌이었다.
책과 컴퓨터에 관련된 것들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가장 후하게 지출하는 품목들이다. 한 권의 책이나 기기 하나를 장만하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부자가 된 기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키보드를 받은 그날도 나는 원하던 장난감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종일 그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 새 키보드가 찍어 내는 글을 보고 있으려니, 누런 갱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쓰던 습작 시절이 문득 생각났다. 그 싸구려 종이조차 연필 꽁무니의 지우개로 지우며 아껴야 했던 궁핍의 시절이었다.
200자 원고지 10매 남짓의 수필 하나를 써 내기 위해 괴로움으로 뒤채던 날들이었다.
정규교육 6년의 짧은 지식으로, 국어사전도 없이 써 내려가는 글쓰기는 소풍 날의 보물찾기와 닮아있었다.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끙끙 앓다가 절망으로 주저앉아 울던 시간들이었다.
쏟아진 낱알처럼 어지럽게 흩어진 갱지위의 글 속에서, 쓸 만한 것들을 골라 정성스레 원고지를 채워 마침표를 찍고 나면 간신히 지탱하던 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세상이 핑그르르 어지럽게 돌고 뱃속이 뒤집히며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러나 오래 굶은 텅 빈 위장에서 미지근한 공기만 넘어오는 구토는 이물질이 넘어오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작가가 되는 길은 지옥의 길이구나.”
글 하나를 써 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단념하거나 돌아설 수 없었다.
그 길을 통과하면 천국이 있다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다.
어쩌다 받는 공모 당선 통지서, 그것이 바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묘약이고 천국문이었다.
내 생애 가장 부자가 되었던 날
작가라는 이름을 얻고 처음으로 작품을 계약하던 날, 나는 착수금으로 받은 돈을 몽땅 털어 원고지를 샀다. 오랜 세월 갈망했던 소원이 성취된 날이었다.
내 평생 그때처럼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윗목에 쌓인 원고지 상자가 세상 제일의 보물 상자라도 되듯 보고 또 보며 잠을 설쳤다.
원고지 한 권을 꺼내 밥상과 책상 겸용의 작은 상 위에 놓고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 보았을 때의 그 매끄러운 감촉에 나는 화들짝 몸을 떨었다. 라면 값을 아껴 문방구에서 샀던 원고지와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같은 종이의 전혀 다른 그 느낌은 아마도 도전과 성취의 차이였을 것이다.
아끼던 모나미 볼펜을 꺼내 원고지 귀퉁이에 ‘1’이라는 첫 글자를 써넣으며, 비로소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깨물었다.
작가협회에서 회원증을 발급받던 날의 감격은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사람 없는 장소를 찾은 것이 화장실이었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작가 신분증의 이름과 사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분명한 내 이름, 내 얼굴이었다.
“나, 드디어 작가 됐어!”
엄마와 오빠네가 사는 집 현관문을 들어서며 나는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저녁상에 둘러앉은 엄마와 오빠의 가족들이 나를 보았다. 나는 그들에게 작가증을 흔들어 보이며 폭발할 것 같은 웃음을 꾹꾹 삼켰다. 가족들의 시선이 잠시 작가증에 닿는 듯하다가 이내 밥상으로 되돌아갔다. 그 뿐이었다.
앉아서 밥이나 먹으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칭찬 한마디면 고래처럼 춤추며 밥을 먹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리 칭찬에 인색했던지…
참고 있던 환희의 웃음이 통곡으로 터질 것 같아 얼른 오빠 집을 뛰쳐나와 내 자취방으로 달려갔다.
비닐 옷장에서 이불을 모두 꺼내 바닥에 깔았다.
두꺼운 이불 속에 들어가 공격당하는 거북이처럼 꼭꼭 나를 감싸고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사방의 틈새를 알뜰히 여몄다.
그제서야 작가증을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꼬옥 누르며 목청껏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내 안의 눈물을 다 짜내 버려야 할 것처럼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기진맥진, 호흡곤란이 소리를 낮췄지만 멈추지는 못했다.
밤새도록 흐느꼈다.
춤추는 고래가 부럽다
나는 칭찬받지 못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국민학교 6년 동안 우등상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고, 백일장과 사생대회, 서예대회 등에서도 숱하게 상을 받았다. 그러나 가족에게 축하나 칭찬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엄마, 나 상 탔어!”
처음 한두 번은 자랑도 해 보았다. 그러나 엄마는 냉담했다.
“잘했다고 주는 거 아니다. 더 잘하라고 주는 거다.”
열 번을 넘게 받아 가도 늘 같은 말이었다. 다른 아이들의 부러움과 이웃 어른들의 칭찬이 전부인 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만은 꼭 그 말을 듣고 싶었다. ‘잘했다’거나 ‘애썼다’는 가족의 한마디를 꼭 듣고 싶었다. 대견스러워하는 핏줄의 웃음을 보고 싶었다. 설마 그날만은 그렇게 해 주리라 굳게 믿었다.
“그게 뭔지를 알아야 축하를 하든가 칭찬을 하든가 하지.”
언니에게 쏟아 놓았던 하소연을 전해 들은 엄마와 오빠는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그들은 정말로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집에만 있는 나는 게으르고 한가한 존재로 여겨져 걸핏하면 심부름을 부탁 받았다. 관공서에 가서 서류를 떼 오라든가 상가에 가서 잘못 산 물건을 교환해 오라든가 하는 따위의 잔심부름이었다.
원고 마감이 임박해 거절했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진한 원망도 들어야 했다. 부탁이 아니라 강요인 셈이었다.
나와 가족들의 관계는 점점 꼬이고 틀어졌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영화 시사회나 개봉 얘기도 물론 하지 않았다.
“너는 네 영화가 상영되는데도 가족들한테 알리지도 않니?”
“내 작품 아니야. 작가 이름 봐, 내가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어깃장을 놓으며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 거리를 넓혔다.
나는 작가다
그런 어느 날, 같이 일하던 영화인들이 우리 집에 같이 가게 되었다. 감독님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오빠와 악수를 하고 엄마에게는 무릎을 꿇는 큰절을 했다.
노래와 영화를 무지하게 좋아했던 오빠에게 연예계 사람들은 영웅이었다. 특히 영화감독은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게 된 오빠는 비로소 여동생의 위대함(?)을 인정하며 감동해 마지않았다.
“아이구, 작가 동생 덕분에 영화감독님과 악수도 해 보네. 네가 참말로 난 인물이구나.”
아들의 감격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엄마는 그랬다.
“인간 안된 것들 하고 어울려 허튼 짓이나 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들 반듯한 사람들로 보여 마음이 놓인다.”
내 엄마만 할 수 있는 칭찬이었다. 그래도 칭찬이라 기분 좋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 작가증은 사람들 앞에서 맥을 못 추는구나.”
조금 민망하고 많이 서운했지만, 가족들에게 작가로 인정받은 게 어디냐 싶었다.
비로소 가족들은 나를 한심한 잔심부름꾼에서 약간의 대접 받는 위치로 올려주었다.
마음껏 원고지를 어루만지고 방해 없이 빈칸을 채워 가는 삶은 몹시 행복했다.
워드프로세서를 장만할 때 나는 아주 많이 망설였다.
원고지의 그 사랑스러운 촉감과 사각거리는 속삭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뼘 넓이 액정 화면의 워드프로세서가 플로피 디스크의 뚱뚱한 컴퓨터로 바뀌고, 살을 뺀 뚱보 컴퓨터는 날씬한 노트북으로 변신했디.
이제는 옛 추억이 된 원고지 사랑. 그러나 새로 산 키보드의 타건감에서 나는 원고지의 첫 경험을 고스란히 느꼈다. 원고지를 닮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키보드 감촉 때문에 컴퓨터 앞에 더 오래 머물고 싶어졌다.
“나는 작가다.”
새 키보드로 쓴 첫 문장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영원한 글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