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말고 모험

유명한 곳들을 편하게 찾아다니는 여행은 유람이거나 고급 관광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정도 목적지도 없는 내 자동차 여행은 단연코 모험이다. 지적 호기심에 의한 학술적 행위나 탐험이 아니라, 개인적 호기심에 의한 충동적인 떠남이다.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싶은 열망이며, 그것이 요구하는 육신의 수고를 기꺼워할 용기가 우선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소유를 최소화할 때, 모험은 극대화된다’는 말도 함께 염두에 둔다.
때문에 내 자동차에는 필수품이 아닌 게 거의 없다.
텐트와 취사 도구, 슬리핑백과 재킷, 쌀과 라면, 간장과 소금, 그리고 여행 첫 경험에 의해 필수 항목이 된 것들 -기름통, 히터, 선풍기 등등- 절대 필수품인 그것들을 챙긴 다음, 기분에 따라 간식이나 음료수 같은 보조 필수품도 최소한으로 챙겨 넣는다.
그것들은 가능한 한 모두 트렁크에 넣고 뒷좌석은 비워 두려고 한다. 텐트를 칠 상황이 못 될 경우 침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어두울 때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는 내 수칙에 따라 휴게소나 월마트 같은 곳의 주차장을 찾게 되는 밤이 더러 있는데, 그런 곳에서는 뒷좌석이 임시 침대가 되기 때문이다.

“안 하고 말지, 그렇게 구차스러운 여행을 왜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같은 산을 반복해서 찾아가는 하이커나 등산객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편안한 숙소에서 입에 맞는 식사를 하며 안내인을 따라 명소들을 탐방하는 것이 그들의 여행이었다. 오락과 유흥 시설이 갖추어진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떠다니는 유람 정도는 되어야 자랑할만한 여행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근사한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 가운데는 종종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에 실망하고 불평하는 이들이 있었다. 자본을 투자해 기대라는 것을 구매하면 그런 일들이 따르기 십상이다.

그러나 모험을 좋아하는 내 유랑여행은 언제나 설렘 가득하게 전개되다가, 멈추기 싫은 아쉬움으로 마지못해 돌아오는 것이었다. 실망이나 불평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예전부터 그랬다.
집에서 떠나는 건 좋아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건 죽을 만큼 싫어했던 나였다. 허락만 된다면 김삿갓처럼 길 위의 삶을 살고 싶었다. 유교 사상으로 찌든 집안에 계집애로 태어나 부당한 차별을 당한 것보다 계집애라서 막히곤 했던 길 위의 자유가 더 한스러웠다.

나의 떠남은 늘 일곱 살 겨울 기차 여행의 추억과 함께였다. 친정 나들이를 하는 엄마를 따라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가에 가던 날의 경이로운 기억이었다.
화물칸으로 짐작되는 그 기차 안은 어린아이 손바닥 넓이의 가지런한 나무 조각들로 바닥을 깔고, 가운데쯤에 둥그런 양철 굴뚝이 천장을 뚫고 올라간 무쇠난로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둘러앉은 허름한 사람들이 허름한 얘기들을 나누고 있다가, 엄마와 들어선 어린 나를 보고 조금씩 뒤로 물러 앉아 공간을 냈다. 나와 엄마를 위한 자리가 난로 가까이에 만들어졌다.

그날 그 기차에서 본 것은 내 생애 최고의 풍경이었다.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굉장한 경이였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 있는 것들이 고스란히 같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움직이는 순간 개체로 흩어지는, 그런 모양만 보아 왔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은 그보다 더한 경이로움이었다. 산과 들은 결코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 아이에게 모든 것들이 흐르고 변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은 신비한 대자연의 유체 이탈인 양 경탄스러웠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떠남에 대한 열망도 자라났다. 신호를 받지 못하면 멈추지 못하는 기차처럼, 멈춤을 지시하는 신호가 없었던 내 열망은 무작정 앞으로 내닫기만 했다.
여행을 떠날 때 느끼는 설렘과 기대는 출발을 알리는 기차가 토해 내는 굉음과 증기 같았다. 그 폭발할 것 같은 지독한 흥분은 떠남을 부추기는 이유들에 앞장섰다. 가끔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좌절과 어린 육체가 겪어 낸 아픔이 불쑥 튀어 올라 삶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가 비집고 들 때가 있기는 했었다. 그러나 떠남의 설렘이 너무 강렬해 포기나 종지부 따위는 순간으로 스쳐 갔다. 다행이었다. 돌아올 때의 발걸음은 여전히 길고 무거운 꼬리를 매단 채였지만.

작은 땅 여린 존재의 방랑은 선택의 폭도 작고 여리기만 했었다.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고 자란 덕에 지나가던 농가에서 일을 도와주고 그날 먹을 것과 잠자리를 해결할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것은 한철만 번성하는 메뚜기의 일생 같았다. 농사철이 지나면 그만인 그런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 시절의 허술한 복식(服飾)으로 한데서 겨울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찬바람이 힘을 내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바쁜 농사철을 피해 다니다 농한기에 들어오는 계집애는 온 가족들에게 밉상이었다.

좁은 길, 긴 여행

그러나 대륙의 여행은 많이 달랐다. 자동차라는 기동력과 텐트라는 주거용품이 갖추어져 꼬리가 너무 무거우면 가벼워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은 게 우선 달랐다.
쌀과 라면을 주식으로, 간장과 고추장만 있으면 얼마든지 괜찮은 식성은 특별히 다행한 조건이 되었다.
예전, 달걀을 깨 넣은 뜨거운 밥에 간장을 넣어 비벼 먹던 별식은 대륙의 여행에서도 변함없는 꿀맛이었다.
찬밥을 물에 말아 고추장 찍은 야채와 먹는 점심도 여전히 특별했다.
뒤집어 든 냄비 뚜껑으로 접시를 대신해 젓가락으로 건져 올린 면발을 후후 불어 먹는 뜨거운 라면은 목에 넘어가기도 전에 출출함을 씻어 내는 듯한 신기한 음식인 것도 여전했다.
그러한 먹거리를 모르는 고급한 여행객들은 좀처럼 누리지 못할 나의 유랑여행이었다.
참 많은 것들에 감사를 빚지고 산다는 깨달음도 쟁여지는 좁은 길 여행이었다.

그렇게 강아지 내삐와 함께했던 64일간의 첫 번째 여행은 얻은 것들이 꽤 풍성했다.
대륙의 다양한 표정에 상당히 익숙해지며 야영지에 관한 상식과 요령도 습득했다. 무엇보다도 대륙 전역을 종횡으로 누비겠다는 결심이 견고해졌다. 자신감이 넉넉해진 것이다.

이제 강아지 없이 혼자서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삐는 나보다 더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는데, 점점 자동차 타는 것을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가다가 정차를 하고, 대소변을 보게 하고 산책을 시킨 후에도 차에 타지 않으려고 엉덩이를 뒤로 뺐다. 한 번은 영 말을 안 듣고 자꾸만 멀어져 간 적도 있었다.
“그래, 그럼. 넌 그쪽으로 가고 난 이쪽으로 간다. 잘 가라…”
그런 식으로 으름장을 놓으며 차 시동을 걸었더니,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차 타기가 얼마나 지겨우면 저러나 싶어 어찌나 마음이 어두워지던지… 그런 녀석을 위해 캠핑장에서 며칠을 묵었더니 그것도 또 지루해했다.
좁은 길로 다니며 자연을 즐기는 여행은 미적 감수성이 있는 나만의 것이었다. 경외감과 심미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없는 강아지에게는 즐거움이 아닌 곤혹일 터였다. 그런 아이에게 아름다운 풍광따위는 무의미했다. 복잡하고 넓은 길을 달리며 갖가지 자동차들과 그 안의 사람들, 그리고 반려동물들을 지나쳐 가는 것이 차라리 아름답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지만 남부의 겨울은 아직 한참 먼 곳에 있었다. 그러나 강아지 내삐를 위해 그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집에서 겨울나기를 하며 내삐의 유랑여행 노고를 조금이나마 보상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마음이 예전처럼 어둡지 않았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이 빛이 되었다.
다음 여행도 여전히 일정도 목적지도 없는 유랑여행이겠지만, 내삐 없이 혼자서도 괜찮은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안전하고 즐거운 여정을 위해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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