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에 눌리는 삶
숫자는 힘이 세다. 나이와 돈의 숫자는 특별히 세다.
나란히 선 두 개의 주유소 기름값이 0.1달러만 차이가 나도 싼 곳으로 끌리게 되고, 한여름 전기세 고지서가 10불만 올랐어도 10불만큼의 마음 무게가 얹힌다.
마찬가지로, 55세 때의 ‘senior discount(경로우대)’라는 말은 특권처럼 들렸는데, 65세가 넘자 그냥 ‘senior citizen(노인)’이라는 말만으로도 늙음의 무게가 확 느껴졌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을 늙은이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침마다 꼴이들과 가파른 언덕을 단숨에 뛰어오르고, 갖가지 예쁜 꽃들로 마당을 가득 채우고, 직접 가꾼 채소로 식탁을 준비하는 나 자신은 늘 푸른 젊은이였다. 미국인들과 사는 덕택에 할머니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노인이면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메디케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준비하면서 비로소 나이와 대면해야 했었다. 그런저런 서류들에 기재되던 내 나이, 65라는 숫자.
그때부터 그 숫자가 내 삶에 슬슬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라는 말이 툭툭 튀어나와 어지간한 의욕은 쉽사리 부러뜨리며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했다.
독감주사 후유증으로 중단한 대학원 공부가 그랬고, 코로나 감염으로 포기한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종주가 그랬다.
대부분의 동포들도 ‘그 나이에 공부해서 어디다 써먹으려고?’ 하는 말로 부러진 내 의욕을 한 번 더 부러뜨리곤 했었다.
오십 대에 멈추었던 대학원으로 되돌아가려고 틈틈이 기회를 엿보았지만 ‘이 나이에 뭘’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자 무기력하게 밀어내기만 하게 되었다.
PCT 종주도 그랬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밀리고 밀려나던 계획이 70이라는 숫자에 도달하자 주저앉기 시작했다.
60세에 하이킹을 시작해 트레일 세 곳을 모두 완주한 여성도 있다는데, 메리 데이비슨(Mary Davison)이라는 그녀가 마지막 코스를 종주한 나이가 76세였다는데, 그런 것들도 먼 남의 얘기로 치부되었다.
“저 여자가 했는데 나는 왜 못해?”
10년 전만 해도 그랬었다.
풀 먹인 옷깃처럼 빳빳하던 그 오기가 비에 젖은 문종이처럼 후줄근해지던 나의 70대였다.
86이라는 숫자의 눈부신 빛

그런데 오늘, 내 삶을 다시 아침으로 돌려놓는 눈부신 돋을볕 같은 카톡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예전에 함께 영화를 만들었던 이기원 감독님의 편지였다.
86세라는 그 연세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셨다는 굉장한 내용이었다.
대학원 졸업 종합시험에서 ‘영상문화 콘텐츠학과 미디어 방법론,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문화정책 세미나’ 그 어려운 세 과목을 동시에 최종 합격하였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공부하는 도중 눈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시고 교통사고로 6개월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기도 하셨다는 감독님은, ‘흐릿해지는 눈을 비비며 책장을 넘기고, 꺾이는 허리를 복대로 곧추세우며 이뤄낸 결실’이라고 얘기하셨다.
몇 번의 휴학과 복학에 지쳐 체념하셨을 법도 했지만, 기어이 학위라는 결승점에 도달하신 그분의 저력에 내 머리가 처져 내렸다. 이어 나 자신에 대한 느닷없는 부끄러움이 블랙힐스의 거침없는 바람처럼 왁하니 밀려왔다.
내가 굉장한 무게를 부여했던 나이의 숫자 70이 감독님의 86이라는 숫자 앞에 깃털 하나의 무게로 팔락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눈 내리는 언덕길에 미끄러져 손목이 부러진 거 말고는 병원 신세 안 지고 살아온 건강한 신체, 슬그머니 자리 잡던 암세포도 가볍게 물리친 깡다구 넘치는 내가, 왜 안 하던 나이 타령으로 넘치던 의욕을 기죽이고 있는가’라는 질타가 나를 흔들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 인생 길라잡이는 엄마였다.
“나도 대학병원 한 번 구경해 봤으면 좋겠다.”
철없는 소녀처럼 수줍고 쑥스러운 엄마의 소망에, 자식들은 ‘그냥 검진’이라는 명목으로 대학병원에 모셨다.
이런저런 현대식 기계검진을 받으며 마냥 흐뭇해하시던 엄마때문에 모셔간 우리들도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하던지…
84세에 돌아가시던 그날도 엄마는 산책을 다녀오고, 소소한 집안일을 해 놓으시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드셨다.
식사 도중에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눈을 감으신 엄마는, 평생 남의 손 빌지 않고 자신을 건사하다가 유난한 그 성품처럼 깔끔하게 삶을 마무리하셨다.
나도 엄마처럼 그렇게 살다 가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혼자인 내가 남의 손 빌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건사하다 가는 것, 그것이 내 목표가 되었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언제나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애를 써왔다. ‘울 엄마처럼만 살다가 가자’ 이러면서.
길라잡이들
그랬던 내게 강력한 롤모델, 위대한 길라잡이가 한 분 더 출현한 것이었다.
나도 감독님처럼 박사학위에 도전하겠다거나, 대학원으로 되돌아가 기필코 끝을 내겠다거나 하는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은 아직 아니다.
다만 여든여섯을 청춘으로 살아가시는 감독님처럼, 그리고 가시는 날까지 청결하게 사셨던 내 엄마처럼 살자는 다짐을 더 굳건히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정갈하게,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읽고 쓰며 싱싱하게 살아가자는 다짐이었다.
최근 구글 애드센스 승인이 안 나서 기분이 무지 드러웠는데(ㅋ), ‘그까짓 거!’ 이러면서 확 밀쳐 놓기로 했다.
난 장사꾼이 아니라 글쟁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아직, 뭐든지 할 수 있는 70대 청춘이야.”
숫자는 힘이 세다. 그러나, 나이라는 숫자는 힘이 없다.

동감이예요. 저도 나이와의 전쟁을 합니다. 남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체험하는 성취는 그저 와아 하는 감탄으로 스쳐가는 남의것일뿐: 나에 대한 비하와 미움은 자꾸만 커가네요. 시간이 지나면 낳아지겠지 했던게 까마득한 옛날인데 그희망은 점점 자리를 좁히면서 뒷걸음질을 하고 그저 바보라고 툭툭입에서 튀어나오는 횟수만 자꾸 늘고 있어요. 점점 불어나는 숫자는 입으로 꺼내기가 무서운데 사회는 더 자주 그숫자를 들으려하구요. 이젠 살만큼 살았다로 위안을 합니다 😅